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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왜 미디어는 메시지인가?
(2) As We May Think (by Vannevar Bush)
(3) Donna Haraway의 Cyborg Manifesto에 관한 짧은 해석
(4) Hegirascope(by Stuart Moulthrop)에서 몇 가지 형식적 특징들
(5) Cybernetic Esthetics, Hypertext and the Future of Literature(by Molly Abel Travis)
(6) Cyberspace and the World We live in (by Kevin Robins)
(7) 영화『메멘토(memento)』에서 기억과 매체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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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한 몇 편의 에세이

 

조 성 훈 (shjo@shjo.net)

 

 

왜 미디어는 메시지인가?

 

기술 매체는 두 방향의 형식적인 운동을 통해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연장(延長)의 속성을 갖는 덩어리를 절단한다. 기계 테크놀러지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절단 기능은 외면적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로, 자동화된 기계는 사물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방향을 따라 대상을 절취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결을 잃어버리고, 절단의 외면적 운동과 그 힘의 규격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잘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공간은 기하학을 재현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이 힘에 대한 역기능으로 일관되어 왔다. 둘째로, 매체는 절단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여 일련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하나의 자동화의 메커니즘이 출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자동화는 자연적 인과성을 결여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요소들은 이미 외면적인 방식으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연된 관계를 갖는 잘려진 것들이 특정한 연속을 띠기 위해서는 이들의 간극이 얼마나 최소화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 매체의 관건은 거리와 간극의 최소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속도로 대체되고 공간은 이를 압축이라는 형식으로 표상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조차도 지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간화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의 미적 표현에 있어 선(線) 특히 직선은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현대의 기술매체는 사물의 유기적 연장을 불연속의 연쇄로 치환하고, 이 외삽으로부터 생기는 간극과 균열은 속도의 최대화에 의해 봉합된다. 물질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생산기계의 자동화는 배치와 순차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 즉 속도의 최대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나아가 대중 매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매체가 활용되면서 이 간극은 제로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공간으로부터 시간성이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선분이 아닌 하나의 점의 상태가 된다.

매체는 사물과 현상들의 불연속적 연쇄를 만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패턴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선 그것은 감각능력들의 종합적 활용을 요구한다(멀티 미디어를 보라). 나아가 그것은 공간적 거리를 종합함으로써, 이 거리에 상응하는 신체 경험의 간극을 현재적 상태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지각은 매체의 속력의 증감에 의존한다(승강기나 자동차를 보라). 또한 매체는 시간적 차이 역시 무한한 현재 속으로 체포해 버린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순간이며, 우리의 지각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테르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사물의 연쇄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물질적 두께가 제거되고 나면, 다시 말해 지각의 동시성이 발생하여 물질의 운동에 상응하는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적 인과성이 절연되어 요소들 각각 자신 안에 어떠한 것도 내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던 연쇄 메커니즘은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가 이제는 인과성을 갖는 새로운 내용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루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자: "가장 위대한 반전이 전자성(electricity)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없앤다. 그리고 이제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마치 연쇄나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것처럼, 사물들의 원인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McLuhan 12). 하나의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이 언급한 영화매체나 큐비즘도 역시 분절과 연속의 메카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특정한 형식의 인식활동을 만들어낸다. 큐비즘의 발생 시기와 근사(近似)한 영화매체는 분할된 컷들의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일종의 구조적 환각을 생산하는 장치가 된다(주1).

 

기술 매체의 운동이 연결이나 이동인 것만큼이나 그 심층에는 절단과 절연이 있으며, 그들간의 재 연결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활동이 있다. 그런데 자르고 봉합하는 종합형식이 동시성을 띠면서, 매체는 세계를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매체의 급진적인 변화는 경험 능력들을 신체로부터 박탈하여 그 자신이 대리자가 된다. 매체는 일종의 신체가 되는 것이다. 매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비롯하여 신체일반의 확장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과거였다면 반드시 자연적 조건들과 결합함으로써만 현존할 수 있었을 실재성을 그 자체 순수회로로 변형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의 실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된다.

맥루한의 관심은 바로 이 매체가 갖는 통합체적인 특성에 있었다. 모든 계열을 합목적성을 띤 사이버네틱 회로망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실체가 되는 힘. 그는 이 힘이 질료적 경험을 축소하고 추상적 견해와 반응만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주2). 그는 매체가 모든 부분들을 종합하는 원리를 허위적 연결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허위적인 이유는 인식의 실질적 조건인 감각과 지각을 불균형적인 상태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는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념이나 동의보다는, 매체가 이미 갖춘 추상적 운동에 의해 동질화되는 감각과 지각의 패턴들이다.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동이 아니라, 동질적인 추상관념으로부터 감각으로의 이동으로 순서가 역전된다: "기술의 효과는 여론이나 개념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McLuhan 19).

단일한 회로로 동화된 신체로부터 우리 자신은 자연스럽게 행위나 관념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단일성과 전체성의 효과 아래로 집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신호이며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고 행위하고 사유하도록 강요하거나 권고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행위이며 사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체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11) 것으로서 사용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를 결정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주1)

Andre' Bazin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그는 영화로써, 자연을 자르지 않고, 그 연속성의 신비를 고스란히 포착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가 점점 내면적 영혼의 문제에 천착해 갔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주2)

"토인비는 영매화(etheri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매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는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사회에서 매체와 기술의 효과와 관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 반응이며, 인쇄기술의 결과는 우리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3차원의 망상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되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이 간파했던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경구와는 담을 쌓는다".(McLuhan 20)

 

인용문헌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As we may think (by Vannevar Bush)

 

새로운 과학과 도구의 사용은 과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현실화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우선 물리적 환경의 통제, 의식주 개선, 안전의 보장, 자연상태에 노출된 생물학적 굴레로부터의 해방, 생물학적 진화과정에 대한 지식의 증가, 질병과 수명의 연장, 정신 건강의 개선 등이 있을 것이다. 소통이 발달함으로써 생각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기술의 좋은 점은 개인뿐 아니라 종 전체로 확대된다.

엄청난 연구 성과들이 있지만, 모두가 독립적으로 생산된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다른 분야의 연구에 의존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시간적 제약, 기억할 수 있는 양의 한계 등으로 인해 학제간의 교량이 될 만한 것들은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만델의 유전법칙이 한세대동안 빛을 못 본 이유가 그의 저작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듯이, 과학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은 연구성과 만큼이나 중요한 연구결과의 유포(전달)와 검토일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고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수단은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현대 기술이 등장하기 전 세대에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동의어였다. 생각은 발전했지만 그것을 현실화할 물리적 기제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경제적 여건과 생산체제(대량생산이나 노동력 등)의 한계로 인해 현실화할 수 없었던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나, 생각은 훌륭했지만 건설 유지비용의 부담 때문에 좌절되었던 베비지의 계산기, . . . 만일에 파라오가 자동차를 구체적으로 디자인하고 실제로 실험해 보았다 해도 그것은 왕국에 엄청난 세 부담을 안겨주면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타자기, 무비카메라, 자동차, 자동 전화 등 교체 가능한 부속을 장착한 기계나 얇은 유리단자에 싸여 전선에 섬광이 있는 라디오 열이온 진공관 등이 수도 없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섬세한 부속과 함께 장인들의 솜씨를 능가하는 정밀한 공학적 설계로 구성되어 30센트 정도면 거뜬히 만들어진다. 우리는 값싸고 성능 좋은 정밀기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확대되어야 한다. 옛날엔 쓰기와 사진, 인쇄 등으로 기록했지만, 지금은 필름이나 Wax disks나 마그네틱 선으로도 기록한다. 이보다 더 혁신적인 공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변하고 있고 확대되고 있다.

사진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지속되는데, 더 자동화되고 세공이 잘된 민감한 복합물들이 미니카메라 개념을 낳았다. 미래에서나 볼 법한 이러한 카메라는 본체 위에 작은 장치를 달고 평방 3미리 크기의 그림을 찍을 수 있고, 렌즈 초점이 사방에서 가능하며, 육안으로 보이는 어떠한 물체도 볼 수 있고, 자동 노출로 광대역 조명이 가능하여 천연색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입체경이라 할만하다.

건식사진(dry photography)이 가능할까? 브래디가 남북전쟁 때 찍은 사진은 판을 노출시킬 때마다 ?Ъ탑 했다(습판 사진술 wet collodion process). 지금은 대신에 현상할 때 습기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아마도 ?Ы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질산염이 주입된 필름을 사용했다. 그래야 현상하지 않고도 찍자마자 사진을 낼 수가 있었다. 암모니아 가스에 노출되면 노출되지 않은 염료는 파괴되고, 사물의 상(象)이 빛에 의해 찍힌다. 또 다른 과정이 있지만 여전히 느리고 서투르다.

삼십년동안 염료가 주입된 종이를 써서 전기장치에 접촉되는 점들을 검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다. 종이에 포함된 요오드 화합물 속에서 일종의 화학변화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음반을 만들거나 여러 기록장치로 쓰였는데, 바늘이 필름이나 종이 위를 움직이면서 자취들을 남긴다. 바늘 끝의 전기장(electrical potential)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변한다. 그러면 바늘이 지나간 선은 전기장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이 장치는 현재 팩스에 사용된다. 두 끝을 가진 바늘이 (열쇠복제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원본 위를 돌아다니면서 자장을 이용해 변화를 감지하고, 이것이 다른 쪽 바늘로 전송되어 복제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카메라를 대체하여, 원거리에서도 가능하다. 좀 느리고 화질도 별로 이지만, 또 다른 형태의 건조사진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사진이 찍히는 즉시 출력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1초간 16개의 선명한 이미지를 전송하는 텔레비전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라면, 텔레비전은 바늘대신에 전자빔이 움직인다는 점이고(빠른 스캔), 단순히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종이나 필름이 아니라 전자가 닿으면 순간적으로 빛을 내는 스크린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움직이는 영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기록 속도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빛을 내는 스크린 대신에 화학변화를 이용한 필름은 연속적인 사진이 아닌 한 장의 사진을 전송할 수 있으며, 이는 건조사진으로 빠르게 찍을 수 있는 속성 카메라를 탄생시켰다. 화학 처리된 필름은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문제는 진공상태의 상자 안에 필름을 넣을 때 생기는 방해물들이다. 전자빔은 아주 섬세한 환경에서만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름과 전자빔의 방을 각각 분리시켜, 서로 다른 쪽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건조사진처럼, 마이크로 카메라 역시 갈길이 멀다. 기록물을 최소화하는 장치는 영사(影寫)로 가능하다. 광학적 영사와 축소된 사진의 결합은 학문적 목적에 의해 이미 마이크로 필름을 만들어 냈고 잠재 가능성이 많다. 현재 마이크로 필름으로 20배율로의 축소는 이미 도입되었으며, 재 확대되었을 때 완벽한 선명도를 유지하게 했다. 100배율로 축소된 종이두께의 필름을 생각해보면, 책을 종이에 기록한 양과 그것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제한 것 사이에는 10000배의 차이가 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냥갑 만한 크기로 축소 가능한 것이다. 수백만 장서의 도서관도 책상 하나 크기로 축소 가능하다.

물론 단순한 압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을 만들고 저장하는 일 뿐 아니라 그것을 분류하고 색인하는 검토작업도 필요하다. 하지만 비용을 생각해본다면 압축이 매우 중요하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된 브리태니커를 만들려면 니켈 하나정도의 물질이면 족하다. 또 단 1센트면 어디서든 메일을 보내고 받을 수가 있다. 수백만 권의 책을 복사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그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기록을 하려면 펜을 집어들거나 타이프를 때린다. 그리고 교정, 식자, 인쇄, 제본의 복잡한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기존의 메커니즘을 변용하고 언어를 변경하면 이러한 복잡한 과정 없이 다양하게 기록할 수 있다.

Voder라는 기계가 있는데, 키보드를 누르면 말로 변조되어 나온다.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만 키 동작이 단순히 전기로 만들어진 바이브레이션을 결합하고, 이것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벨연구소에서는 이를 반대로 바꾼다. 일명 Vocoder라 하는데, 스피커 대신에 마이크로폰을 사용한다. 말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키가 움직인다. 음성학적으로 단순화된 언어로 말소리를 기록하는 속기타이프라이트(stenotype)와 이 Vocoder를 결합시켜서, Vocoder가 속기타이프라이터를 작동시킨다. 이 결과가 말할 때 찍히는 타이프라이터이다. 현재의 우리 언어는 이러한 메커니즘에는 적절하지 않다. 만국어를 만드는 학자들은 어째서 언어를 전송하고 기록하는 기술에 적합한 언어를 발명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특히 과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앞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고, 기존자료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자료를 만들고 하는 등등. 성숙한 사고를 기계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지만, 생산적이고(creative) 반복적인 사고는 기계적인 것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계산기(행위)는 반복적 사유 과정이며 오랫동안 기계에 속한 문제였다. 키보드로 조절하고, 숫자에 맞는 키들을 누르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도 피할 수 있다. 광전지를 통해 타이프로 찍혀진 숫자들을 읽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키들을 해독하는 기계들이 만들어 졌다. 이것들은 스캐닝을 위한 광전지, 논리적 변이들을 분류하는 전기회로, 솔레노이드의 움직임을 해독하는 계전회로 등의 결합이다. 만일 숫자들을 위치로 찍어 간단히 점들의 집합으로 변환한다면 숫자 해독체계는 더 간단해 질 것이다. Hollorith가 인구조사를 목적으로 만든 펀칭 기계는 카드에 구멍을 뚫어 이러한 메커니즘을 구현했다.

덧셈은 계산의 한 예에 불과하다. 전산(電算)은 가감승제를 수행한다. 여기에 일시적인 결과저장, 더 나아가 다른 처리를 위해 저장에서 제거하고, 최종결과를 인쇄함으로써 기록한다.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데이터 입력을 손으로 조절하거나 자동으로 조절하는 키보드 기계와 펀치카드 기계이다. 이들은 사실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이보다 빠른 전자계산이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출현한다. 이들은 열이온 진공관 장치를 만들어, 초당 100,000번의 전기 임펄스를 계산한다. 미래에는 지금의 100배 이상의 속도를 낼 것이다.

 

반복적 사유는 계산이나 통계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다. 이미 확립된 논리적 과정에 맞게 사실들을 결합하고 기록하는 매순간마다 사유의 창조적 측면이 개입된다(자료나 처리과정을 선택할 때 등). 그리고 다음에는 반복적 조작이 따르며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산은 사업의 필요성이나 확장된 시장이 요구될 때에만 발전한다. 생산방식이 충족될 만큼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의 진보가 보장되는 것이다. 진보한 분석기계만으로는 그러한 상황은 오지 않는다. 아직까지 시장의 확장도 없고, 빠른 처리방식의 사용자 역시 많이 없기 때문이다. 미분방정식, 함수, 적분 방정식을 푸는 기계, 조수간만을 예측하는 고주파 합성 장치 등 특이한 기계가 많지만 이들은 일부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하다. 만일 과학적 추론을 논리적 계산과정으로 제한한다면,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다. 포커게임에서 이기려면 확률수학을 사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염주 알을 묶어 쓰는 주판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몇 세기나 앞서서 자리계산법(positional numeration)과 0개념을 생각하게 했다. 아직도 유용하기에 쓰지 않겠는가?

주판과 현대의 계산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고등수학에서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계산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확립된 공식에 맞추어 세심한 변환을 반복하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위해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수학자는 숫자들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며, 미적분을 적용해서 방정식을 변환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들은 상징적 논리를 고차원의 지대(plane)에 위치시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특히 그가 도출하는 계산과정의 선택 속에서 직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언제든 논리적 사유과정이 전개되면, 기계가 출현할 기회는 반드시 생긴다. 형식논리학은 긴요한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쉽게 하나의 기계를 구성하여 간단히 교차회로(relay circuits)를 사용하면 형식 논리에 맞게 전제를 다룰 수 있다. 또한 전제들의 집합을 장치에 넣고 크랭크를 돌리면, 키보드 덧셈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논리적 법칙에 따라 쉽게 결론들을 뽑아낸다.

수학적 논리에도 직관이나 판단이 있어야 하듯이, 논리적 진보에는 새로운 심볼리즘이 요구된다. 이것은 논리적 인과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새로운 상징주의는 아마도 수 체계를 공간으로 치환한 것일텐데, 이것은 수학적 변용을 기계적 과정으로 이끄는 것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수학자들의 엄격한 논리를 넘어서는 일상적인 논리의 적용이 필요하다. 자료를 엄청나게 쌓아놓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검토하고 처리해야할지 당혹스럽다. 이는 과학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추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획득된 지식을 어떻게 유용하게 뽑아낼 것인가?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별해야 한다. 회사에서 고용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인 카드들을 선별기계에 넣고, 미리 계획된 코드를 넣으면 특정한 지역에 살며 스페인어를 하는 고용인의 목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파일 안에 있는 수백만 명 중 하나의 지문을 찾으려면 너무 느리다. 물론 선별기계는 빨라질 수 있다. 광전지와 마이크로 필름을 이용하면 훨씬 빠르게 항목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 씩 교대로 검토하고 점점 하위 항목들로 내려가서 특정한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뽑는 이 과정은 단순한 선별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진보적인 방법이 있는데, 자동 전화교환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전부 하나 씩 검토하지 않고, 처음 세 자리로 분류된 것만 검토함으로써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더 빠르게 하려면 기계적 개폐장치를 열 이온 진공관 개폐기로 대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이용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거래가 가능하다(전자빔을 이용한 바코드방식도 그 예이다). 그러나 선별과정의 진짜문제는 색인 체계의 피상성에 있다. 어떤 종류의 자료가 저장고에 쌓이면 알파벳순으로 혹은 번호순으로 파일이 된다. 그리고 정보를 추적해서 분류별로 정보를 찾는다. 여기에 일정한 규칙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규칙들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의 항목을 찾으면, 그 경로체계에서 나와서 다시 새로운 경로를 입력해야한다(즉, 분류하고 선택하는 기계적 과정이 Dos의 경우처럼 선형적이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어야하고, 코드화된 규칙을 사용자가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연상으로 움직인다(연상체계, 비 선형적, 과(hyper)공간적). 하나의 항목이 선택되면, 그것은 재빨리 연상에 의해 선택된 다른 항목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복잡한 단서나 흔적들(trails)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순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궤적이나 단서들에 따라 연상되는 데로 이동하는 것이다(꿈의 경우처럼). 기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속도는 엄청나다. 인간의 이러한 정신적 과정을 인위적으로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체계를 만들 수는 있다. 우선 연상에 의해 선별된 자료들은 색인에 의한 것 보다 더 빠르고 유연하다. 미래에 개인은 체계화된 개인 파일이나 개인 도서관을 가질 수 있다. "memex"가 이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개인이 모든 책을 기록하고 소통하고 저장하는 장치인데, 엄청난 속도와 유연성으로 자료들을 처리한다. 또한 사용자의 기억이나 연상에 친숙한 대용물이 될 것이다. 데스크형식으로 구성된 이 장치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마이크로필름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책과 그림과 잡지 등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저장하고 처리하고, 화면상에서 직접 프로젝션을 통해 자료를 한꺼번에 볼 수도 있다.

메멕스는 연상적 색인(associative indexing)을 가능케 하는데, 자료의 모든 항목들은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자동적으로 즉시 선별 가능해진다. 우선 사용자가 단서와 흔적들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코드화한 이름들을 입력하고 키보드를 누른다. 사용자 앞에는 연결된 두 개의 항목이 보이고 볼 수 있는 장소에 투사된다. 각각의 버튼에는 빈 코드공간이 있고, 포인터가 이들 중 하나의 항목을 선택할 수 있다. 키 하나를 누르면 항목들은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제든지 항목들 중 하나가 보이면, 다른 항목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에 상응하는 코드 공간에서 간단히 불러들일 수 있다. 또한, 많은 항목들이 하나의 단서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될 때, 이들은 반복해서 다시 볼 수 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정확히 물리적 항목들이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과 흡사하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활과 화살의 기원과 성질에 대해 관심 있다면, 특히 어째서 터키의 활이 영국의 긴 활보다 더 유리한지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관련서적이나 기사들을 자신의 메멕스에 보유하고 있다. 우선 그는 백과사전에서 관심 있는 논문을 찾는다. 그리고 이 찾은 것을 스크린에 남겨 놓는다. 다음에 역사책에서 또 다른 관련 항목을 찾아 이 두 개를 연결시킨다. 이런 식으로 많은 항목들의 단서(흔적)를 만들어 놓는다. 경우에 따라 자신의 코멘트를 삽입하고 이를 중요한 단서와 그것에 연결된 부수적인 단서를 특정한 항목들에 삽입시킨다. 사용하는 재료의 탄력성이 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는 부수적인 단서들 위에 가지를 쳐서 교재를 통해 탄력성과 물리적 견고성의 표를 얻게 된다. 그리고는 길게 분석한 그 자신의 페이지를 삽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백과사전이 출현할 것이다. 연상의 흔적들과 단서들로 그믈망이 이루어진다. 변호사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관련된 견해들과 판례들을 다룰 수 있으며, 동료들이나 권위자들의 경험도 확보한다. 특허 변호사는 많은 양의 특허처리를 불러와서, 친숙한 단서들을 그의 고객의 관심에 맞는 것으로 짜 맞춘다. 의사들은 단서를 쫓아 환자의 복잡한 반응을 이미 연구된 사례들을 가지고 빠르게 유사한 병력으로 치료하고, 참고문헌을 찾아 관련 해부학이나 조직학의 고전들을 참조한다. 화학자들은 유기복합물의 종합을 연구하면서 모든 화학관련 자료를 연구실에서 불러들여, 복합물들의 유사관계를 따라 흔적을 찾고, 부수적인 단서들로 그 복합물의 물리적 화학적 습성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방대한 연대기를 가지고 언제든지 최신의 단서들을 찾아서 모든 시기들을 검토할 수 있다. 새로운 전문직이 출현하여 단서들을 재단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기록을 이용해 유용한 단서들을 만들 것이다. 전문가로부터의 유산은 단지 기록 한가지를 추가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발판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이 생산하고 저장하고 기록을 검토하는 방식들을 충족시킨다. 이는 미래의 수단을 크게 발전시킨다. 모든 종류의 기술적인 문제들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무시되었던 것은 기술적 진보(열 이온 진공관처럼)를 가속화할 알려지지 않은 수단이다. 현재의 패턴에 고착해서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을 말해야 한다. 예언이 아니라 제안의 차원에서 말이다. 예언이란 알려진 것이 확장되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기초한 예언이란 다만 두 번 추론된 추측일 뿐이다.

기록에 필요한 재료들을 창조하고 흡수하는 모든 단계들은 감각들 중 한가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키를 만질 때의 촉감, 말하거나 들을 때의 구강, 읽을 때의 시각 등. 언젠가는 이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인 경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눈을 통해 볼 때, 모든 관련 정보들이 시신경 채널을 통해 전기파장이 뇌로 전달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텔레비전 케이블이 보여지는 전기파장들과 유사하다. 이 파장들은 그림을 스캔하는 광전지로부터 방송되는 라디오 전송기로 보내진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적절한 도구를 이용해 그 케이블로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만질 필요가 없다. 이 파장들을 전도체로 뽑아내어 전송되고 있는 장면을 드러내고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두드리는 전화선처럼 말이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사람의 팔 신경에 흐르는 임펄스는 그의 눈과 귀로 번역된 정보들을 손가락으로 보낸다. 손가락이 적절한 키들을 두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흐름들을 포착할 수는 없을까? 정보가 뇌로 전달되는 원래의 형태나, 이것이 손으로 전달되어 놀랍게 변형된 형태들이 포착되거나 감지될 수 없을까? 우리는 이미 골전도(bone conduction)로써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신경채널에 전달할 수 있었다. 현재처럼 처음의 전기파장을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변형하는 지루함 없이 이러한 것들을 도입할 수 있을까?(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신호로 처럼), 혹은 인간의 메커니즘을 즉각 전기적 형태로 변형하는 일은? 두개골 양쪽에 전극봉을 끼워 뇌파촬영을 하면 잉크로 기록된 흔적을 만들어 뇌 자체의 움직이는 전기현상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기록은 감지되거나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증가하는 대뇌 메커니즘의 잘못된 기능을 잡아낼 수는 있다.

모든 지각 가능한 외부세계의 형태들은, 소리이건 시야이건 간에, 전기회로를 통해 변형된 흐름 또는 전류의 형태로 환원되어 전송된다. 인간의 구조 내에서도 정확히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전기적 현상을 다른 것으로 진행하기 위해 기계적 운동으로 변형시켜야 하는가? 이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즉자성과의 접촉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확실히 보증할만한 예견이 나오기는 힘들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더 잘 회상하고 현재의 문제를 보다 완벽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더 고양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문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록을 더 완벽하게 체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과학적 실험들을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고, 별로 좋지도 않은 기억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옆길로 새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물이 이해하기 복잡해도, 필요할 때 다시 옆에 놓을 수 있다는 확신만 든다면, 복잡한 것을 잊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이탈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과학을 적용해서 인간은 풍요로운 거주공간을 만들었다. 거기서 건강한 삶을 배우기도 했다. 또 그를 이용해 대량학살도 자행했다. 정말로 좋은 곳에 과학을 써보기도 전에 싸우다 죽을 판이다. 그러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과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단하고 과학이 안겨주는 희망을 잃는 것 역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1945년 7월에 The Atlantic Monthly 잡지에 실린 Vannevar Bush의 논문 "As we may think"를 요약 번역한 것임.

 

 

 

 

Donna Haraway의 Cyborg Manifesto에 관한 짧은 해석

 

우리나라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관한 글들은 대체로 소개하거나 인용하면서 전개되는 것 같다. 따라서 해러웨이를 구체적이고 논쟁적인 관점에서 대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녀의 글을 끌어들여 자신의 생각에 후원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많다.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사이보그에 관한 해러웨이의 논점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절취하는 방식에 있다.

그 중 하나가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 논의들의 속뜻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로봇이나 기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거기엔 구시대의 가치가 존속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구시대적인 가치와 결합되면서 혼종성을 띠고 괴물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구시대적인 가치에 대한 향수를 발생케 하는 것이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산물은 구시대적인 것 같지만 원래부터 존속해왔던 것으로서 인간의 몸이 없으면 한계로 가득 찬 로봇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테크놀러지의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확장된 테크놀러지와 그 산물로서 기계에 대한 인간주의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순수한 존재로서 인간. 그러나 테크놀러지가 이를 타락시키고, 인간을 기능화 하여 지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병적이고 불순한 이미지로 가득 찬 괴물이며 하나의 불행이다. 따라서 되돌아가서 타락한 불행의 존재를 타락 이전의 존재로 복원시켜야 한다.

 

테크놀러지에 관한 이전의 비판적 관점들(해러웨이는 이전의 맑시즘과 몇 몇 페미니스트를 예를 들고 있다)은 사이보그를 인간성의 타락으로 간주하거나 남성적 우월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봄으로써, 인간주의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에는 모두가 비슷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주의적 가치를 복원시키려는 관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기확신에 찬 주체성이나 순수 정체성을 지키고 복원시키려는 의도뿐 아니라,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추상화하는데 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고 타자로 만듦으로써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자신을 추상적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남성에 대립하는 존재로서 여성을 주장하는 이전의 몇 몇 페미니즘의 관점과 다르지 않게, 사이보그를 순수한 인간의 몸이 불순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이해함으로써, 인간적 가치들을 복원시키겠다는 생각은, 인간이 실제로 다른 존재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관념적 소망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결정하려는 의도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데, 우선 인간주의는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배타적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자존적 존재로 만들어 고립화하였다. 따라서 둘째로는, 다른 존재와의 대립적 혹은 대상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임의적으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마치 여성이 대립적 관계에 있는 남성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함으로써, 스스로 여성이라는 추상적 대립을 상정한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또한 세 번째로, 모순적 관계 속에서 추상화된 존재는 필연적으로 적(敵)에 상응하는 대등한 힘을 가진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네 번째로, 이 정체성은 추상화된 방식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실질적 힘을 가진 존재가 중화되어 커다란 하나의 전체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이때에 모든 실질적 존재는, 남성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여성, 혹은 자본에 대립하는 소외된 존재로서 노동, 권력의 대상으로서 피지배자, 더 나아가 이성을 가지지 않은 다른 모든 존재와는 구별되는 순수 현존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소유한다. 결국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 존재는 인간주의적 가치(인간/동물, 유기체/기계, 물질/비물질 등의 이분법)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배제되었거나(특히 여성) 타락한 것(순수한 인간성) ― 사실, 이러한 타자들은 지배자에 의해 결정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닉하다 ―을 복권시키는데 집중한다: "신은 죽었다. 따라서 이제는 여신이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주의적 감상이 아니었으며, 대립물의 통일이나 전복도 아니었으며, 순수 현존의 복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그녀에게 사이보그 이미지의 유용성은 부정에 의한 결정이나 망상적 신념에서 존재의 추상성을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사이보그 이미지는 인간주의적 규준들(사유, 감정, 판단, 능동 등) 자체가 이미 추상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결정은 우리 자신의 신념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사이보그 이미지는 더 이상 이 원형의 규준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로부터 파생하는 지배의 수단으로서 존재의 경계구분이나 위계가 파괴되는 지점에 사이보그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우리 자신이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으로서 사이보그임을 알게 된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사이보그 이미지에서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위상 자체가 문제시된다. '사이보그 육체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단일한 정체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기계적인 기술에서 맛보는 강렬한 즐거움은 더 이상 죄가 아니라 형상화의 한 측면이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관점이고 형상화된 우리의 한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존재 방식의 문제이며, 그래서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론이며 . . . 정치학'이다.

더 이상 완전한 신체를 반영하지도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의 부분적인 결합으로 구성된 사이보그(의 이미지)는 이런 의미에서 탈 인간화(de-humanization)의 모델인 셈이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적 가족의 모델 위에 세워진 공동체의 꿈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외디푸스적 기획을 가지지 않는다. . . . 사이보그는 . . .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의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의 서출내기(illegitimate offspring)이지만, 동시에 그를 낳게 한 원본을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Haraway, Donna.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91.

 

 

 

 

Hegirascope(by Stuart Moulthrop)에서 몇 가지 형식적 특징들

 

이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으며, 하이퍼 텍스트의 주목할만한 형식을 이 텍스트의 특징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글이 가만히 붙박혀 있지 않는다.

편집된 화면에 나타나는 일군의 글은 저자가 계획해놓은 절차에 따라 순환적이거나 연결적으로 바뀌면서, 다음 화면의 다른 내용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글의 내용을 마치 버스를 타고 창가에서 지나가는 광경들을 보듯이 쳐다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글들을 꼼꼼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행동을 직접 취해서(부라우저 조작) 억지로 붙잡거나 편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자는 그 글들에 무심해야 할 것이며, 순차적으로 바뀌는 화면에 눈을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dive in).

 

2. 순환적인 화면 전환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구가 있다.

매 화면에 나타나는 글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연결 지점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특히 눈에 띠는 단어가 나오거나 관심이 가는 구절이 나오면, 현재 화면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순차적인 변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텍스트의 특징은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전체의 스토리와 내용을 이해하여 큰 틀로 구조화할 수가 없다.

플롯을 따라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파편화된 문구들을 계속해서 연결하여 놓았기 때문에, 하나의 구조를 띠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맥락을 전체화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지도가 없는 셈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처럼, 이 글들은 처음과 끝이 없으며, 어디에서 시작해도 무관하다. 이 텍스트는 하나의 브리꼴라쥬이다.

 

4. 저자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활동을 텍스트로 재현하고 있다.

파편적으로 흐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탈하게 끔 제작된 이 텍스트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도약하여 본성적으로 다른 내용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이나 연상의 흐름처럼, 이리저리 흐르다가 다른 출구로 나가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어, 이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꿈의 흐름을 쫓는 듯 하다.

 

5. 이 텍스트는 의미와 관련하여 메타-텍스트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의미해석의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1. 저자가 꾸며놓은 의미에 독자는 침잠되어 그 의미를 내면화하거나 향유하고 느끼는 방식이다(내면화된 독자). 2. 저자가 계획한 의미에 함몰되기보다는, 텍스트에 나타난 의미가 어떻게 제작되고 짜여지는지를 찾는 방식이다(분석적 독자). 독자는 Hegirascope를 읽으면서, 의미해석의 두 번째 방식처럼, 계속해서 넘어가는 구문들과 사방으로 갈라지는 링크들에 침잠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 의미를 내면화하고 음미하기보다는(드러난 전체의미 조차 파악 할 수가 없다),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더 나아가 독자는 구성된 의미의 수용자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구성자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는 메타텍스트적이다.

 

6. 하이퍼 텍스트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퍼포먼스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문자 기호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통해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연결된다. 다시 말해 하이퍼 텍스트는 기호의 의미론적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각활동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Hegirascope는 쓰여진 글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 즉 글자 크기, 색깔, 화면 레이아웃, 화면 색, 이동 속도 등, 각각의 노드와 링크가 구성되는 모든 요소들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요소들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단일한 재료의 의미론적 구성이 아니라, 모든 공 감각적 요소들을 동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7. 선을 벗어난 시간

이 텍스트의 저자인 S. Moulthrop은 이 작품이 시간을 근간으로 하는 텍스트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텍스트 역시, 저자의 말에 따라,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 구현된 시간은 고전적 형식의 문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이 텍스트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를 구성한 저자나 텍스트를 따라가는 독자의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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