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의 “테크놀러지”라는 마법이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버커츠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예술은 사람들이 “모닥불”가에 모여서 인간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사실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간의 지리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전자 통신 때문에 더 이상 “실제의 모닥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전세계 사람들이 이야기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어느새 “정신이 걸러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장소가 주었던 분위기”가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결국, 버커츠는 스토리텔링이 “현 순간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디지털 미디어가 기존의 욕구 충족 뿐 아니라 스토리텔러가 제공하는 단순한 오락적 차원을 넘어선 현실의 욕구를 어떻게 채워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 디지털 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사색(reflectivity)과 주관성(subjectivity)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버커츠는, 사람들이 사색하는 독서에서 멀어지고 현란한 디지털 미디어(예를 들면,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 등)의 쾌락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그 자체보다는 디지털 테크놀러지가 꽃피워놓은 문화적 분위기에 그 위협이 있다고 주장한다.
버커츠는, 이런 분위기가 통신이나 오락 산업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는 않겠지만, 의미있는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버커츠는, 본질적으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과 디지털 미디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자각을 뺏어가기 때문에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자각은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 자신과 자연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디지털의 발전이 흥미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지만, 매개 테크놀러지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단절시킨다고 생각한다.
즉, 테크놀러지는 그런 종류의 인식에 필요한 감각의 껍질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버커츠는, 디지털 미디어가 일상의 추진력을 제공하고 “한 분야를 창조함으로 분리된 자아” 를 치료하기 보다는 주로 “자극을 과하게” 주기 때문에, 자아의 방향에서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프로이드는 “자의식(consciousness)의 주요 기능” 예를 들면 사색과 주관성 등이 자극으로부터 보호한다”고 믿었다. 버커츠는 이런 기능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할 수 없다고 본다.
3) 스토리텔링의 기초는 미지에 대한 한계, 제약, 충동에 있는 것은 아닐까? 버커츠는 자신이 고집스럽게 “미지의 것, 소외된 것에 대한 한계, 제약, 충동이 내러티브 아트의 진정한 기초라고 주장하는 사람같이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하이퍼텍스트 링크를 통해 편지, 일기, 여러 상황 등을 알게 되는 것처럼 부수적인 것들에 접근하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얻는다기 보다는 사실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버커츠는, 예술이 “사색하는 감성을 일깨워주는 계산된 빈공간, 즉 격차의 문제”라고 믿는다. 본질적으로 스토리텔링의 미학은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이야기 뒷면에 있는 생각과 가능성을 청자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능력에 있다. 반면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소주제나 심지어 플롯까지 제공해주며, 청자는 비선형 플롯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링크나 비트로 된 문서들 속에서 시간을 쓰며 허비하는 것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버커츠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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