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나왔을 때, 스필버그의 역량에 새삼 놀랬다. 자신의 처지에서 할 일을 다하자라는 류의 중산층 정서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쉰들러 리스트>만 해도 '그럼 그렇지' 라고 시큰둥했는데 이 영화는 확실히 격이 달랐다. 전쟁 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올린 오마하비치 상륙작전의 압도적인 비주얼은 영화가 추구하고 있는 이념적 진중함에 비하면 사족으로 여겨질 정도.
이 영화는 좀 밀러 대위가 이끄는 소대가 왜 생면부지의 '라이언'을 찾아서 그토록 생고생을 해야하는지가, 라는 질문을 툭 던져 놓는다. 도대체, 라이언이란 어떤 놈이길래. 그런데, 막상 라이언이란 놈을 구해놓고 보니,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전장을 가로질러 올 만큼 가치가 있는 녀석이더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필버그의 솜씨는 이런 것이었다. 형제가 모두 사망한 라이언 일가의 마지막 아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떠난 밀러 소대의 여정은 왜 미국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등치된다. 그들이 구한 라이언은 그들이 조국에게 투사하는 이상형이고, 그들의 전쟁은 끔찍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모호하고 거대한 조국애를 양념으로 영화의 환상성에 기댄 스펙터클에만 의지하던 전쟁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나 할까? 스필버그가 2차 대전이라는 역사적인 전쟁에 던진 거대한 물음은 비록 보수적일망정 그가 지닌 비전의 깊이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MBC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스핀오프 격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재방송하기 시작했다. 이미 감상한터지만, 재방송을 다시 보기로 했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스필버그가 <라이언일병 구하기>에서 던진 질문을 보다 체계적이고 풍부하게 그려낸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의 모습을 보다 풍부하게 담보하면서 감동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제대로된 후속작인 셈이다.
그런데, 문득 월남전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궁금증도 떠올랐다. 스필버그가 영화의 소재를 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든다. 월남전은 어떻게 해도 그 정당성을 설득할 수 없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을까? 멜 깁슨 주연의 <위 워 솔저>는 전쟁의 순수한 형식에 주목하며 미국과 월남의 전사 역시 훌륭한 '군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월남전은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전쟁'이었지, 2차 대전과 같은 이념이나 사상은 담보한 전쟁은 아니었다는 작은 반증은 아닐까 싶다.
게임에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일란성 쌍동의 격인 <메달 오브 아너>라는 작품을 고르면 된다. 하지만, 게임은 총에 맞아도 에너지가 닮으면 그만이고 그나마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특징 덕분에 전쟁의 비극성은 잘 살아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담고 있는 이념적 물음에 한발 다가선 게임은 <콜 오브 듀티>가 아닐까 싶다. 아래 글은 예전에 끄적거려두었던 것이다.
Call of Duty 작품론 게임, 영화의 '한계'를 넘보다.
1. 게임, 또 하나의 전쟁
게임이란 어차피 또 다른 가상 ‘전쟁’에 다름 아니다. 편을 가르고 승자를 정하는 게 전쟁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전쟁과 게임의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한쪽이 잠시의 흥분을 털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지만, 다른 한쪽은 사람의 목숨이 오고 가며 그 상흔은 세기에 걸쳐 지속된다.
형식상의 유사성 때문인지 게임과 전쟁은 원래 짝패로 붙어 다녔고, 컴퓨터 게임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개체의 개체에 대한 투쟁’을 근본 정신으로 하는 다종의 FPS에서 지휘관의 지위에 앉아 병력을 배치, 조정하여 전략을 구상하는 <스타크래프트>류의 전략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컴퓨터 게임의 거의 절반은 명시적인 전쟁 혹은 전쟁의 모티브가 채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게임과 전쟁의 이러한 외연적 친밀함에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무엇일까? <코만도스>나 <히든 앤 댄저러스> 같은 게임은 명시적으로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게임들은 플레이어를 특정한 위치에 잡아맨다. 연합군의 특공대가 되어 독일군 진지로 침입한다. 독일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미션을 수행한다. 여기서, 2차대전이라는 내러티브 담론은 게임의 재미를 강화하기 위한 거죽에 불과하다. 잡입, 암살, 파괴, 구출 등의 게임 요소를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빌어온 것일 뿐이다. 요컨대, 게임은 전쟁을 ‘경험’으로 다루지 않고 그 요소만을 취해 자신의 논리에 접목한다. ‘경험’의 재현이라는 목표는 게임에서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재현의 장르인 영화가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게임과 다르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쟁을 소재로 액션을 전시하고 영웅만을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일관하는 ‘게임 같은’ 전쟁 영화들도 많지만, 게임에 비해서는 영화는 ‘경험’을 중시한다. 게임과 동일하게 목표물을 파괴하는 미션이라도 게임이 명민한 움직임, 전략, 그리고 정확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캐릭터들의 관계, 심리 변화 및 전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담게 된다. 대개, 걸작으로 꼽는 전쟁영화는 이러한 전쟁의 ‘경험’을 제대로 다루거나 이를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전쟁의 여러 측면 중에서 요소 및 전략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경험을 취할 것인지는 다분히 영화와 게임의 질적 차이를 반영한다. 즉, 전쟁의 전략 요소와 진행은 인터랙티비티로 일컫는 플레이어의 구성과 개입이 필수적인 게임과 잘 어울린다. 반면, 전쟁의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에는 시청각을 통해 정형화된 내러티브를 전달할 수 있는 틀을 갖춘 영화가 보다 우월하다.
2. 오마하비치에 상륙한 <메달 오브 아너>
<메달 오브 어너: 얼라이드 어설트>(MOHAA)는 제작사 2015이 PC로 선보인 게임이다. 시리즈는 원래 PS으로 시작되었으나, 게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큰 인기를 얻은 것은 MOHAA를 통해서였다. 게임 장르로서 보자면 MOHAA는 전형적인 FPS이다. 모두 쏴 죽이기(Shoot’em All)이라는 기조는 이 게임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고 유지된다.
MOHAA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게임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모티브들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게임에서는 전쟁의 특정한 상황이 강조되었을 뿐 영화와 같은 수준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게임에서는 적군을 제거하는 방식, 아니면 적진에 침입하는 경로가 중시된 대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계나 사건들이 괄호로 묶여졌다.
그런데, MOHAA의 백미라 할만한 오마하비치 상륙작전 미션은 영화에 버금가는 ‘경험’을 담고 있다. 플레이어는 초인적인 힘과 엄청난 화력을 지닌 수퍼 히어로도 아니요, 목표물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름 모를 졸개들을 이리저리 보내기만 하면 되는 초연한 사령관도 아니다.
MOHAA의 오마하비치 상륙작전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묘사한 장면의 경험을 그대로 따라간다. 상륙선에 탑승한 주인공은 고개를 돌려 좌우의 동료들을 본다. 배 멀미 때문에 모두 거북한 표정이고, 한편에서는 토악질까지 해댄다. 배가 오마하비치에 닿자마자 독일군의 기관총과 포탄이 쉼없이 날아든다. 허리를 숙이고 이리저리 몸을 피해보지만, 적군의 기관총을 피하긴 힘들다. 포탄에 튀어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떨궈지는 전우들의 시체.
FPS 게임을 즐기다 보면 초월적인 자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들곤 한다.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무거운 무기도 거침없이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렇게 총을 들고 미로 속을 뛰어다니고 있노라면, 진정한 ‘액션 히어로’의 기분을 만끽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런데, MOHAA의 오마하비치 미션이 주는 느낌은 FPS에서는 느끼기 힘든 무기력이다. 쏟아지는 독일의 포대로 홀홀 단신 과감히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의 전쟁에서처럼 그러한 영웅적 플레이는 자살 행위이다. 같은 이차대전을 배경으로 독일의 비의秘儀적인 음모를 파헤치는 <리턴 투 캐슬 울펜스타인Return to Castle Wolfenstein>에서도 MOHAA의 오마하비치와 같은 무력감을 경험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무기력감은 게임의 ‘연출’의 일부로 유도된 것이다. 게임 제작자의 의도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플레이어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랬다. 스피커의 좌우를 가르며 날아드는 총탄과 전우들의 아우성. 적의 기관포대를 박살낼 수 있는 초월적인 무기는 말할 것도 없이 박격포 하나도 없이 플레이어는 이렇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어쩌면, MOHAA의 오마하비치 상륙 장면은 영화를 따라잡겠다는 게임의 몸짓이 날개를 편 그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 게임은 영화를 내용 그 자체에서만 접근했다. 게임은 영화의 내러티브와 플롯을 충실하게 추종했고, 근사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멋지게 렌더링된 ‘영화’ 같은 컷신으로 슬쩍 속여보고자 했다. 하지만, 인터랙티비티를 통한 구성의 유희인 게임은 영화가 주는 추체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게임이 영화가 주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감동’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는 인터랙티비티로는 그럴듯한 추체험을 제공할 수 없다는 빈정거림이기도 하다.
MOHAA는 게임의 고유 영역인 ‘구성’을 통해서 오히려 추체험이 더욱 극적인 형태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분명, 인터랙티브한 구성이 이루어져야 할 게임의 플레이 공간에서 MOHAA는 플레이어가 지닌 구성의 권능을 제약하고 심지어 잔인하게 빼앗아 버린다. MOHAA의 오마하비치 장면을 처음 플레이할 때를 떠올려보라.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며 미션은 뭔지 저으기 당황스럽다. 인터랙티비티를 만끽하리라 예상되는 공간에서 그 놀감을 잃어버린 플레이어가 느끼는 당혹감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압도적인 비주얼이 주는 경험과 맞먹을 만큼 강력하다.
3. <콜 오브 듀티>, 2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조각 그림 속으로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는 MOHAA가 추구한 인터랙티비티를 이용한 추체험이라는 새로운 틈새를 한층 더 벌려놓는데, 덕분에 COD라는 게임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한계, 영화의 주변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COD는 신생 제작사 인피니티 워드의 작품이다. 인피니티 워드는 MOHAA를 만들었던 핵심 개발진 25명이 MOHAA의 제작사인 2015에서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다. 그래서인지, 두 게임의 분위기는 꽤나 닮아있다. 일단, 두 작품은 모두 <퀘이크3> 엔진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물론, 더 많은 기술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COD가 한층 우월한 그래픽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픽 이외에도 인터페이스, 키 조작법, 캐릭터의 얼굴 및 음악 등 게임 전반의 요소와 분위기도 서로 비슷한 모습이다.
그런데, COD는 결정적인 면에서 MOHAA와 차이를 이룬다. 대개, 영화의 추체험은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겪는 사건과 그들의 내적 동기와 더불어 구현된다. 영화에는 주인공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타자를 포함한) 외부 환경과 작용하면서 창출하는 이벤트와 모티브의 연쇄가 추체험의 내용을 이룬다. 물론,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의 동일성 및 중심성을 해체하는 영화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영화 장르 일반의 ‘전위’이자 ‘실험’이라는 위상을 지닌다. 산개하는 여러 캐릭터를 설정하고 이들의 움직임을 혼란스레 배치하여 하나의 거대한 주제나 흐름을 잡아내려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를 몰입하여 보는 사람은 퍽 드물다고 할까?
어쨌든, 영화의 사정이 이렇다면 게임은 어떨까? 캐릭터의 중심성 및 동일성은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장르에 따라서 편차는 있겠지만, 이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몰입할 수 있게 유도하기 위한 게임 디자인의 요구, 그리고 게임의 내러티브를 보다 잘 운반하고자 하는 수단적인 필요성 모두에 부합한다. 그래서인지, 여러 캐릭터를 조작하게끔 허용하는 것이 보편화된 RPG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게임은 주인공 캐릭터 1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간혹, 2명이나 3명 이상의 주인공을 동일한 시간이지만 다른 공간에서 던져두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나, 이는 독립된 2개의 스토리가 적당한 수준에서 얽혀 있는 것일 뿐이다. <바이오 해저드> 2편에서 볼 수 있는 레온과 클레어의 스토리 구성을 떠올리면 좋을 듯 싶다.
그런데, 게임에서 캐릭터의 중심성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컴퓨터 게임의 성격을 두고 벌어진 게임학자들 간의 논쟁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상반된 답을 내놓고 있다. 일단, 게임의 메커니즘과 게임 플레이를 중시하는 루돌로지(ludology)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차피, 게임은 스테이지든 레벨이든 일정한 단위로 나뉘기 마련이다. 그 각각의 단위가 주는 게임 플레이만 중요할 뿐 그 플레이와 플레이 간의 연결은 어차피 자의적이다. 이는 게임 플레이 그 자체에 대해서 덧씌워진 외적 내러티브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 게임을 하나의 플롯을 갖춘 내러티브의 체계로 읽을 수 있다는 내러톨로지(narratology)의 입장에서 캐릭터의 중심성은 포기할 수 없는 게임의 중요한 특질이 된다. 특히, 이들이 논거로 삼는 어드벤처 게임에서 소설, 영화 같은 추체험이 가능한 것은 캐릭터의 중심성이라는 형식적 유사성 때문이다.
이 양자의 논쟁에 개입했던 MIT의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둘을 꼭 대립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며 몇 가지 혼성적 변종 내러티브의 형태들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제시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볼만한 것은 환기의 내러티브(evocative narrative)이다. 게임 플레이는 외부의 보다 큰 (미디어 혹은 현실의) 참조 대상들을 끌어들여서 플레이어의 심상에 자연스럽게 게임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투사한다.
책, 영화, TV, 만화, 그리고 다른 여타 미디어들이 서로 이야기의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각기 최선을 다해 서로 자율성을 지닌 경험을 제공하면서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내러티브를 따라온 사람들이 이야기를 가장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넓은 내러티브 체계 안에 자리잡은 게임을 구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 확실히 게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이미지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모습을 부여하고, 탐험하며 교호할 수 있는 몰입의 환경을 창출하는 것이다. (헨리 젠킨스, “"내러티브 건축로서의 게임 디자인")
다시, COD로 돌아와보자. COD에서 플레이어는 미국의 초년 병사 역할로 시작한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면(게임의 튜토리얼이다), 그는 실전에 투입되어 참전하게 된다. 미국 병사로서 몇 가지 미션을 수행한 후, 영국 특전대가 되어 특수 임무들을 수행한다. 영국 특전대로서 페가서스 다리 사수 작전과 같은 실제의 격전들을 헤쳐나오면, 이번에는 러시아로 옮길 차례이다.
COD의 마지막 토막은 게임의 백미라고 할만한 소련군 미션이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본 것에 뒤지지 않는 처절한 스탈린 그라드 상륙작전이 눈 앞에 펼쳐진다. 상륙선에 몸을 실은 겁에 질린 병사. 그들의 손에는 자기 방어를 위한 총 한 자루 조차 들려있지 않다. 배 옆에는 이름 모를 동무가 확성기를 들고 열성적인 선무방송을 하고 있다. 옆의 수송선이 침몰되자 패닉 상태에 빠진 몇몇이 탈출을 시도하고, 아군은 인민의 이름 아래 그들을 망설임 없이 사살한다. 상륙한 후 총을 배급 받으려 줄을 서지만, 총 없이 실탄만을 지급된다. 2명에 한 자루다. 총알받이가 되지 싫으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총을 찾아내야 한다.
COD는 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의 중심성을 포기한다. 대신, 영화의 한계 혹은 몇몇 TV극에서 실험한 사건에 중심을 둔 공시적인 진행방식을 택한다. 캐릭터가 없는 대신, COD는 2차 대전의 주요 모멘트에 담겼을 법한 박진감과 비장함의 추체험을 던져준다. 그런데, 이는 게임의 몰입 메커니즘이 영화와는 사뭇 다른 것이기에 가능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게임은 기본적으로 레벨 단위로 쪼개진다. 따라서, 레벨과 레벨 사이에 캐릭터의 동일성이 유지가 된다고 해도, 이는 형식적인 부여된 연속성에 불과하다. 게임에 내러티브 구조를 부여하고 컷신을 집어넣는 것은 이러한 불연속성에 형식적인 연속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래서 게임 전체를 영화나 소설에 근접시키려는 방편인 것이다(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루돌로지의 신봉자들처럼 게임의 내러티브나 컷신이 잉여적인 가치만을 지닌다고 못 박을 필요는 없다).
내러티브의 정석적 구조를 포기한 COD는 대신 레벨로 분할된 게임의 플레이 구조를 활용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짜넣는다. COD는 내러티브를 완결적으로 채우지 않는다. 대신, 2차 대전이라는 혹은 2차 대전의 상황을 다룬 영화의 장면들을 빌어온다. 이 게임이 나오자, 게이머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자신이 떠올린 영화를 하나씩 발견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지상 최대의 작전> 등등. COD의 내러티브는 이 영화 중 어느 하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COD는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모티브들을 모두 조금씩 담고 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위의 영화들의 장면을 모아서 편집을 했다면, 그것은 영화가 될까? 다큐멘터리 혹은 DVD 회사의 홍보용 샘플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샘플링 무비에서 엄청난 스펙터클은 느낄지 몰라도, 각각의 영화가 담고 있는 고유한 경험까지 옮겨오지는 않는다. 이것은 보통의 영화가 완결적인 내러티브를 줄 수 있어도, 환기적인 내러티브를 주는 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COD라는 게임은 오히려 이러한 환기적인 내러티브에 강하다. 레벨이나 미션별로 떨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미션과 미션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플레이에서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COD의 개발진이 품은 게임의 정신이 전개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그것은 바로 2차 대전에 “의무적으로 복무(call of duty)”해야 했던 그들의 경험을 게임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2차 대전의 초 영웅에 관한 협소하고 부자연스런 내러티브가 아니라,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전쟁의 추체험을 제공하는 것 말이다.